▲ 권 채 영

문현동을 거쳐 황령산을 오른다. 이 산은 남구의 주산으로 남부산의 축이며 부산진구, 수영구, 연제구를 함께 물고 있다.

산 들머리에 앉은 돌산공원이 막내 봉우리답게 자그마니 어떤 여인처럼 귀엽다. 그 분위기에 맞춰 길 따라 동화의 나라가 펼쳐진다. 흥부와 놀부, 해님 달님, 토끼와 자라, 나무꾼과 선녀에다, 아기 돼지 삼형제, 피노키오, 신데렐라, 백설 공주, 성냥팔이 소녀가 다 모였다. 동화 나라 반상회라도 있는 모양이다.

돌산마을은 일찍이 벽화거리를 조성하여 제법 소문이 났다. 마침 한 무리 학생들이 사진기로 동화를 읽는다.

잠시 그림에 빼앗긴 눈길을 거두어 진구와 남구를 잇는 진남로를 넘는다. 노변에 핀 무궁화가 산뜻하다. 벚꽃 천지강산에 설 자리 잃었지만 제 자식 바라보는 엄마같이 밝은 얼굴을 하고 있다. 마치 모자란 애국심을 나무라기보다 도리어 위로라도 하는 듯. 어릴 제 심고 가꾸기를 장려하던 나라꽃이 고작 애국가에나 등장하는 게 전부일 만큼 귀하신(?) 몸이 되어 반갑고도 안타깝다.

산어귀 밭뙈기와 길가 풀밭에는 북아메리카서 귀화한 개망초가 긴 목을 빼고 향수에 젖어 있다. 가끔 지나가는 바람을 잡고 행여 꿈에도 그리운 고향 소식이나 알까하고 흔드는 몸짓 하소연이 눈물겹다. 초입에 성성한 백발로 옹기종기 누운 무덤조차 덩달아 애처로움을 자아낸다.

무더기로 자란 ‘띠’의 이삭이 만개해 무덤 속의 넋을 부르는 듯 흰 꽃대를 흔들건만 무덤들은 미동도 않는다. 초봄에 띠의 ‘삐삐(삘기)’를 빼어 허기를 채우던 그때 꿈을 꾸는지. 여리고 달달하여 함께 뽑아 먹던 내 동무들도 하마 지금쯤 저런 백발일까? 갑자기 그때가 그립다.

호젓한 오솔길에는 돌멩이들이 구르며 논다. 비탈을 밟고 올라서니 눈앞은 온통 파랑 천지이다. 하늘도, 바다도 파랗고 숲은 더 시퍼렇다. 진초록 소나무는 푸르다 못해 검정빛이 묻어나고, 넓은 잎을 펼쳐든 참나무, 떡갈나무, 오리나무 같은 활엽교목들은 연녹색 고운 빛을 다툰다.

싱그러운 향과 다투어 뿜어 대는 초록에 몸도 마음도 온통 퍼렁물이 들 지경이다. 중간 중간 나무가 양보한 터에는 억새와 산딸기가 자리다툼에 한창이고, 동그마니 앉은 무덤가에는 한 무더기 백선이 곱게 빛난다.
드디어 일천 층계 위에 앉은 사자봉 전망대이다. 여기에 서면 시원한 바람과 함께 동으로 금련산과 장산, 해운대 마천루와 광안대교가 한눈에 든다.

물마루를 따라 남으로 시선을 돌리면 이기대와 태종대, 영도와 남구를 잇는 영남(부산항)대교가 눈에 차고, 서쪽은 부산 상징탑이 섰던 서면교차로. 예서부터 구봉산과 백양산을 끼고 뻗어나간 콘크리트 숲 끝에 아스라이 낙동강이 거울처럼 반짝인다. 눈앞 문현금융단지에 선 우람한 63빌딩(부산국제금융센터)은 사자봉과 키를 재 보자며 덤빈다.

이런 장엄한 풍경 속에 앞을 다투는 차들, 쫓기듯 허둥거리는 사람들, 요란한 기계음, 찢기고 깨지는 날카롭고 둔탁한 소리들이 뒤엉켜 아비규환이다. 살아 있는 도시, 넘치는 활력이라지만 왠지 전쟁터 같아 살벌하고 서글퍼진다.

산으로 다시 눈을 돌린다. 여태 평화롭게 보이던 숲속 또한 마찬가지이다. 일찌감치 터를 잡은 장송과 튼튼한 굴참나무는 느긋하나 그 아래는 오리나무, 자귀나무, 아까시나무 같은 덜 자란 나무와 산딸기, 진달래 같은 관목들이 햇볕 쟁탈에 피 튀기는 싸움판이다.

영국 철학자 스펜서의 ‘적자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다한다. 경쟁에서 밀리면 끝장나니까. 그래도 이 싸움은 운치가 있다. 스스로 힘을 기를 뿐, 결코 서로 몸싸움을 않는다. 반칙도 편법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이들이 살아 있는 선비이고 신사다.

몇 발짝 더 옮기면 사자봉. 그 아래 우뚝한 송전탑이 팔 벌려 허수아비 흉내를 내며, 뾰족 머리로 정렬한 편백나무 숲의 열병을 받고 있다. 더 밑은 대동골, 낙농부락이라 부르던 30년 전 흔적은 사라지고, 성냥곽을 재어 놓은 듯 아파트만 촘촘하다.

건너편에 황금빛 돔은 주인 잃은 슬픔에도 외로이 산잔등을 지키고, 바로 앞 봉긋한 젖무덤 같은 갈미봉 너머 부산항은 컨테이너들로 부산하고, 오가는 배들은 하얀 연서로 푸른 바다와 속살댄다,
수술 같은 꽃을 뽐내는 자귀나무와 그늘에서 하얗게 빛나는 까치수염 꽃을 뒤로 하고 편백나무 숲에 들면 저녁나절같이 어둑하다.

무성한 잎이 햇빛 가리개가 된다. 겉모습과 달리 아랫도리는 온통 벌거숭이다. 힘줄 선 다리로 발가락에 힘주어 비탈을 움켜잡고 용쓰는 모습이 안쓰럽다.

사철 푸른 숲 자랑도 거저는 아니었구나. 수십 년을 산비탈에 선 채로 버텨내기가 그리 호락호락할까. 그 와중에도 삼각형 몸매로 멋 부리는 여유는 어디서 오는 걸까? 죽죽 곧게 자란 형상을 빼박은 기품 때문인가.

울창한 숲이 끝나 바람고개다. 쉼터에서의 커피 한 모금에 몸은 다시 활기가 돈다. 하산 길 배웅은 이별에 자지러지는 매미의 통곡과 임도에 줄지은 가지도, 잎도 온통 초록인 황매화가 휘젓는 손짓이다. 황령산의 여름은 이렇게 무르익고 있다.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