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 채 영

추석이 코앞에 다가오니 문득 이 노래가 생각난다. ‘새 신을 신고 뛰어 보자 팔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어릴 적에 부르던 ‘새 신’이라는 동요의 앞부분이다.

그 때는 때때옷 입고 꼬까신만 신으면 새처럼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 평상 때 ‘타이어 표 통고무신’만 질질 끌다가 어쩌다 명절빔으로 운동화를 사 신게 되면 몸도 마음도 날개가 돋은 듯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요즈음 운동화에 비하면 신발 축에도 끼지 못할 저급품인 데도 말이다. 시골서 자란 나이 지긋한 분이면 누구라도 겪어 아는 일이다.

우리에게도 새 옷과 새 신에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명절이 그렇게 기다려지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란 말이 바로 그 증거이다.

명절이면 객지로 나와 사는 이들이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은 향수(鄕愁)가 아닐까.

태어나서 자란 곳, 고향은 어린 시절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말없이 기다려 주는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곳이다. 세파에 찌든 몸과 마음을 씻기고 추슬러 주는 안식처가 고향이다. 슬픔과 고통을 품으로 안아 어루만지고 달래는 어머니이며, 외로울 때는 친구가 되고, 울적할 적엔 연인이 된다. 그래서 언제나 그립고 애틋한 고향이지만, 명절을 앞두고는 더더욱 눈앞에 아롱대며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펼쳐지던 고향의 모습이 그려진다. 신작로를 따라 줄지어 하늘대는 코스모스, 골목마다 주렁주렁 주황빛으로 물드는 감, 뒷산 어귀에 발간 입을 벌린 밤송이, 황포 주단을 깐 듯 누런 들판, 헤진 옷에 철 지난 밀짚모자로 팔 벌려 인사하는 허수아비, 이런 풍경들이 눈에 선하다.

어디 이 뿐일까.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검정 고무신으로 냇가에서 미꾸라지를 잡는 꼬마들, 콩 서리로 얼굴에 숯검정을 묻힌 아이들, 석양을 등진 채 꼴망태를 메고 소를 모는 초동들, 논두렁 풀을 깎아 바다리(발채) 한가득 짊어진 하얀 한복의 지게꾼, 논둑을 휘감고도 남을 목청으로 ‘훠이 훠이’ 참새를 쫓는 아낙의 모습도 필름이 돌듯 술술 풀려 나온다.

집안을 그려 보면 사립문 옆에 핀 빛깔 고운 풀꽃, 장독대에 널린 빨간 고추, 마루 끝에 뒹구는 몇 톨의 알밤, 축담(지대) 아래 세워진 마른 깻단, 부엌을 분주히 드나드시는 어머니, 마구간(외양간)을 치시는 아버지, 모처럼 본 형을 졸졸 따르는 막내, 마루 끝에 앉아 연신 웃음으로 손자들을 바라보시는 할머니, 굴뚝을 타고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이 모두가 얼마나 정겹고 애틋한 모습들인가.

만나는 이마다 반갑게 안부를 나누고, 오랜만에 만난 동무들과 정을 주고받던 이런 일들도 함께 떠올라 향수를 자극한다.

그러나 추석 같은 명절날, 무엇보다 기억에 남은 일은 귀성객으로 불리던, 고향 가는 행렬이다. 얼마나 많았는지 이 귀성 인파를 4세기말 셈족의 서진에 쫓겨 로마제국으로 이주한 저 게르만족에 비유하여 ‘민족 대이동’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새벽 같이 나서도 차부(요즘 말로는 터미널)에 도착하면 언제나 만원사례였다. 흡사 초등생 운동장 조례같이 목적지별로 줄지어 서서 두세 시간은 예사로 기다려야 탈 수 있었던 시외버스. 그나마 앉은 이들보다 선 이가 더 많아 몸 둘 곳은 있어도 발 디딜 데가 없는 요지경이었다. 오죽했으면 콩나물시루에 빗대었을까.

그런 차안은 창문을 열면 비포장도로에서 이는 먼지투성이요, 창을 닫으면 사람의 열기에 모처럼 멋 부린 옷들이 땀에 젖고 구겨져 엉망이 되었다. 그래도 모두 아랑곳 않고 웃음꽃을 피웠다. 한 방향으로 가는 사람이라 넓게는 다 향우인데다 고향을 가는 들뜬 마음에 마냥 즐거워서였으리라.

그렇게 또 서너 시간을 달려야 갈 수 있었던 고향. 얼마나 고향이 좋고, 가족이 그리우면 선 채로 기다리고, 차를 탄 예닐곱 시간 동안 다리 아픈 줄도 몰랐을까.

아직은 시골에 연고를 두고 고향을 찾는 이들이 많지만, 이젠 고향을 등진 이들도 부지기수이다. 또, 요즈음이야 대부분 자가용으로 확 트인 포장도로를 달려가니, 밀리지만 않으면 시간도 줄고 또, 얼마나 편안한가. 경험 못한 세대에게 말하면 ‘전설 따라 삼천리’라 하겠지만 불과 2, 30년 전만 해도 그랬던 우리다.

얼마 안 가 추석이다. 사실 추석은 달(月)을 기준으로 한 농경사회에 어울리는 명절이다. 곡식이 무르익는 결실의 축제요, 조상께 햇과일을 바치는 의식이요, 추수의 기쁨을 기대하는 잔치이니 딱 들어맞는다. 내용도 뜻도 다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그런 명절이다.

시대의 변화로 지금은 귀성, 조상, 가족 같은 말보다 연휴, 관광, 선물 같은 말들이 더 앞선다고 한다. 하지만 추석은 수 천 년의 맥을 이어온 배달민족의 얼과 혼이 담긴 명절이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문물이 바뀌어도 전통을 잇는 일은 역사를 이어가는 소중한 일이다. 연휴 관광도 나무랄 수야 없지만 어디서 어떤 형태로 추석을 보내건 뿌리 즉, 조상과 가족, 고향을 기리고, 그리는 명절이기를 기대해 본다.

귀성을 하건 않건 모두가 마음만이라도 풍성하고 즐거운 추석, 탈 없이 보내는 추석이 되기를 바란다.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