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운초등학교 교정에 피어있는 매화의 꽃말은 '인내, 고귀, 고결, 깨끗한 마음, 순진무구, 결백, 정조, 충실, 고결한 마음, 맑은 마음, 미덕, 아쉬움' 이다.

눈 속에 핀 매화를 보신 적 있으신지? 매실주 '설중매(雪中梅)'가 아닌 진짜 설중매는 2월의 백운초등학교에 핀다.

언제였던가 1월 중순 치술령 아래 눈 덮인 산길을 걷다 숫눈밭에 핀 매화를 보았다. 왜 선비들이 사군자(四君子)라 하여 매화를 사랑했는지 담박 알아차릴 수 있었다.

혹독한 세파에 시달려도 오롯이 꽃을 피우는 동매(冬梅), 봄이 온 걸 알리는 춘란(春蘭), 서리 속에서도 그윽한 향기를 잃지 않는 추국(秋菊), 사철 푸른 잎을 단 청죽(靑竹)이 선비의 기개를 닮았던 것. 그래서 선비들은 직간하다 죽기도 하고 외침에 분연히 일어나기도 했던 것이다.

왜로 볼모 간 왕자를 탈출시키고 대신 잡혀 고초를 겪다 순국한 박제상을 기다리던 세 모녀가 몸은 망부석이 되고 혼은 한 마리 새가 되어 건너편 은을암으로 날아갔다는 그 매서운 정절 앞에 매화도 눈 속에 꽃을 피웠던가.

▲ 대연동 조각공원의 백매

눈속에 피는 꽃 설중매

어저께 눈이 왔으니 1월 말에 꽃을 피운 UN기념공원 안의 겹홍매도 설중매가 됐다. 보통 유실수는 배나무, 자두나무 등 모두 열매 이름으로 불리지만 유독 매화만은 꽃 이름으로 불린다.

그만큼 눈 속에 피는 꽃을 더 쳐주었던 것이다. 꽃을 사랑한 조선의 선비 강희안의 '양화소록(養花小錄)'엔 식물에 품계를 매겨 매화를 맨 위에 두고 있다.

삼소(三笑) 백용기 선생 산수연(傘壽宴)에서 벗이었던 한국해양대 총장이 <매·란·국·죽을 한 분(盆)에 심어놓은 것 같은 분>이란 축사를 했다. 그 말에 영감을 얻어 인간문화재가 빚어만든 '주물딱분'에다 귀여운 좀대와 백매, 백국과 춘란을 함께 심었더니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늘 곁에 두고 보았다.

삼소 선생은 <하루 세 번 웃자, 눈물이 쏙 빠지고 목젖이 보이도록, 그리고 배꼽이 달아나도록>… 그래서 '삼소'라고 아호 풀이를 하셨다. 경성대 앞 21센츄리시티 원룸에다 부인 권후봉 여사랑 백봉사랑(白鳳舍廊)이라 문패를 다시고 '백봉은 피닉스'라시며, 평생을 맹아학교장 등 교육자로 사신 어른이다.

자녀들 잘 키워 국제금융가와 작가('LA아리랑'을 쓴 백현락이 차남이다), 학자(부산외대 불어학과 백미혜리 교수)로 길러내셨다. 임종소식에 놀라 달려간 필자에게 '꽃 잘 돌보라' 유언하신 지 7년이 지난 지금까지 휴대전화 번호를 지우지 않고 있다. 함남고녀 출신의 사모님은 "하늘에서 동지들과 회의 중이랍니다" 요즘도 말씀하신다.

매화엔 애틋한 전설이 있다. 퇴계 선생이 단양 현감으로 있을 때 선생을 사모한 두향(杜香)이란 기생이 있었다. 어떤 선물도 마다한 선생이 두향의 매화는 괜찮다시며 동헌에 심었고, 도산서원으로 옮겨 지금껏 그 후손이 꽃을 피우고 있다.

선생의 유언이 <저 매화에 물 주라>였으니 얼마나 사랑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필자가 쓴 시조 중에 '매화향'이 있다. <만개한 매화꽃이 향기 또한 그윽하다/심성 곱고 영혼 맑은 사람꽃 그리워라/찬 겨울 언 맘 녹여줄 봄 저만치 오나니>

우리땅이었던 산동(山東)에 질그릇을 만들어 파는 용래란 총각이 정혼한 氷肌玉骨(맑고 깨끗한 매화를 '빙기옥골'이라 한다) 처녀가 죽자 무덤가에서 매일을 울어 눈물 떨어진 곳에서 솟은 매화를 뜰에다 심고 정성껏 길렀는데, 그 뒤로는 왠일인지 그릇도 안 팔리고 노인이 된 총각이 안 보여 문을 열고 가 보았더니 예쁜 그릇 속에 휘파람새 한 마리가 날아갔다 한다. 그래서 지금도 매화가 피면 휘파람새가 그 곁을 떠나지 못하고 한숨 쉬듯 운다는 것이다.

섬나라 일본에도 비슷한 전설이 있다. 명산 순례 중이던 나그네가 동행을 만나 정혼을 했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그만 아들이 죽었더랜다.

한 소녀가 와서 정혼했던 몸이라 이 집에서 살겠다고 하며 총각이 남긴 매화를 정성껏 돌봤더란다. 해마다 많은 꽃이 피자 "나는 임이 그리워 죽겠는데 너는 꽃만 자꾸 피우느냐" 했더니 그만 꽃을 피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자 더욱 슬퍼진 소녀가 "꽃이라도 피워야 내가 살겠다" 하자 다시 꽃을 피웠다는 것이다.

▲ 남구 UN기념공원의 홍매

숨은 미인의 비유되기도

조선 중기의 文臣으로 선조의 신망을 받았던 상촌(象村) 신흠(申欽) 선생은 야언(野言)에서 “동천년로항장곡 매일생한불매향 월도천휴여본질 유경백별우신지(桐千年老恒藏曲梅一生寒不賣香 月到千虧餘本質柳經百別又新枝 - 오동나무는 천 년의 세월을 늙어가면서도 항상 거문고의 가락을 간직하고, 매화는 한 평생을 춥게 살아가더라도 결코 그 향기를 팔아 안락을 추구하지 않는다.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바탕이 없어지지 않으며, 버들가지는 백 번 꺾여도 새 가지가 돋아난다”고 읊었다.

일평생을 주변인으로 춥게 살아도 결코 그 향기를 팔아 안락함을 구하지 않는 매화는 숨은 미인에 비유되기도 하고, 매실은 장아찌와 진액으로 설사 이질 진해 혈변 등에 약으로 쓴다.

조조 군사가 기갈이 심해지자 산 넘어 매실이 주렁주렁 열린 숲이 있다고 말하여 위기를 면했다는 과일이다. 강한 신맛은 황숙기에 덜해져 잘 익은 매실은 달큼하고 맛이 좋다.

매실을 딸 때는 커다란 우산을 가지에 거꾸로 걸고 흔들어 딴다. 꽃봉오리로 만든 매화차는 찻잔 속에 살며시 피어 향기를 뿜는다.

<백매화 두 송이를 가만히 모셔와서/집 안에 두었더니 한 방 가득 향기로세/찻잔에 동동 띄워서 색향미를 맛볼까//입춘볕이 키워내고 봄비에 부푼 꽃눈/봉오리 봉오리를 고운 손길 따왔구나/찻잔 속 살며시 피는 매화꽃 송송이/매화꽃 한 가지가 이렇듯 화사하다/꽃처럼 말없이 자신을 내어주며/기쁨을 선사할 수 있다면 그대 마음 돋는 햇살//봉오리를 따서 만든 매화차가 일품일세/그대 사랑 꽃봉 속에 향기로 담겼다가/찻잔 속 꽃잎 벙그듯 살며시 꽃 피우리>- 졸시 '매화차' 전문

벚꽃을 닮았으나 야단스럽지 않고, 배꽃을 닮았으나 청상스럽지도 않아 군자의 그윽한 자태를 지닌 매화. 올해도 내 마음의 뜨락에 피어 그 정절을 노래한다.           
                       

▲ 김종화 시인

글쓴이 김종화 시인은 남촌문학관장 남구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여 년간 자생식물연구가로 활동하며 들꽃정원 초애원을 운영하고 있다. 시집「흰금낭화 같은 그대」「田園」등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