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를 설레게 한다. 더구나 한 마음으로 함께 가는 길은 더 즐겁고 기쁘기 마련이다. 이 문화유적답사가 그렇다. 문화원에서 해마다 이름 난 문화유적을 찾아 봄, 가을로 떠나는 탐방 여행인데 모두가 문화 방면에 연고를 둔 탓에 마음들이 서로 잘 통하는지 표정들이 밝다.

문화원 이사진과 강사진, 문화단체 대표와 문화부서 직원 가운데 36인이 모여, 들뜬 가운데 문화체험에 나선다. 이번 스무 번째 대상지는 향리인 해인사라 누구보다 더 설렌다.

아침에 일행을 환송 나온 인사들의 옷차림이 흡사 옆쪽 화단에서 웃고 있는 영산홍 같다. 진달래꽃 구경 잘하고 오라는 뜻인가 보다. 다들 찌푸린 날씨를 걱정하다가 흐린 탓인지, 설친 잠을 벌충하려는지 꾸벅꾸벅하는 가운데 쌩쌩 달리던 차가 문득 섬진강휴게소를 지나치며 멈추어 선다.

내비게이션에서 합천이 하동으로 나들이를 갔다면서 우리를 하동으로 유인하고 있는데 어찌해야 할지 묻는다. 합천을 만나려면 합천이 간 곳으로 따라갈 밖에. 순식간에 행선지가 뒤바뀌는 황당한 순간이다.

차창 밖으로 2월의 잔설처럼 군데군데 벚꽃이 남았으나 그 화사하고 화려한 자태는 이미 사라졌다. 배꽃과 유채꽃이 그 빈틈을 채우려 애를 써보지만 힘에 부친다. 대신 연두색 이파리들이 꽃으로 피어나 일행을 반긴다.

드문드문 산기슭에는 진달래가 환한 웃음으로 우리를 맞는다. 드디어 화개천. 쌍계사 팻말이 나들이 왔던 합천은 이미 되돌아갔으니 자신이 해인사를 대신하겠다고 나선다. 십리 벚꽃 길도 이미 빠진 꽃자리가 가렵다며 긁은 자국이 붉고 선명하다.

삼신산 쌍계사라 새겨진 일주문 앞에 선다. 절에 오면 굳이 불교를 신봉하지 않더라도 마음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그런데 삼신산이 궁금하다.

중국 전설에 나오는 봉래산, 방장산(方丈山), 영주산을 통틀어 이르는 말인데, 진시황과 한무제가 불로불사약을 구하기 위하여 동남동녀 수천 명을 보냈다는 이 산들의 이름을 본떠 우리 금강산(봉래산), 지리산(방장산), 한라산(영주산)을 이르기도 한다고. 결국 지리산을 이르는 말이다.

가지런히 선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9층 석탑, 팔영루와 범종루를 지나면 ‘진감선사대공탑비’가 우뚝하다. 석비는 세월의 무게에 일그러지고 찢겼지만 받침돌인 귀부의 눈초리는 금방이라도 기어와 달려들 기세다.

뚜껑돌에 새긴 용도 섬세해 꿈틀거리는 듯하다. 바로 뒤 대웅전도 우아한 곡선으로 오밀조밀 겹쳐진 목재 장식이 화려한 단층과 어울려 빼어난 미를 뽐낸다. 조선시대 불교건축양식의 중요한 자료라 지정된 보물이란다. 대웅전 뜰에 선 영산홍은 수줍은 여승인 양 큰 키에 어울리지 않게 연신 터질 웃음을 참느라 안간힘을 쓴다.

색이 바랜 듯 적백이 조화를 이룬 동백꽃 웃음도 곱다. 바로 위쪽 바위에 새긴 삼전불 앞에 갈기조팝은 강아지 떼처럼 몰려나와 긴 꼬리를 흔들어 댄다.

어수룩해 보이는 마애불 조각 옆 골담초도 노랗고 불그레한 꽃을 욕심스럽게 달고는 무거워 낑낑댄다. 부도 앞 팔작지붕에 가지런한 기왓장들이 봄볕에 그을려 빛날 즈음 경내에 무르익은 봄이 목마른 구경꾼의 이마를 땀으로 적신다.

내리막길에서 만난 도랑에는 난쟁이 풀꽃들이 맑은 물과 함께 졸졸 합창을 하고, 멀리나 가까이에 산들도 누가 보건 말건 새 옷을 갈아입기에 바쁘다. 길가에는 겨울잠에서 일찍 깬 느티나무가 아기 손 이파리로 연둣빛 작별인사를 하고, 늦잠 잔 참나무는 작설(雀舌)을 내놓고 연신 하품을 해댄다. 다리 가에는 두릅, 취나물, 미나리, 쑥 같은 봄나물들이 떼로 몰려 와 서로 데려가 달라고 아우성이다. 성화에 못 이겨 봄나물 대신 불면에 좋다는 국화꽃 한 봉지를 안고 내려온다.

오늘이 장날인가? 화개장터는 시골이지만 이름값 하느라 제법 붐빈다. 아직까지 5일장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반갑다. 지리산 자락에 자리한 때문인지 약재와 녹차(綠茶)가 유독 많다. 여러 가지 먹을거리와 각설이를 보며 잠시 추억에 젖다 식당으로 간다. 섬진강 명물 참게장과 재첩으로 끓인 국에다 더덕 막걸리 한잔을 곁들이니 가슴 속에도 연둣빛이 돈다. 그 풋풋한 기분을 안고 소설 ‘토지’의 무대로 간다.

평사리 주차장에 내리니 엊그제 꽃 핀 매화가 잔뜩 쥔 녹색 구슬을 무성한 잎사귀 사이에 얼른 숨긴다. ‘서희와 길상이’ 간판을 내단 모자상점 옆 도화는 연분홍 미소로 유혹하고, 최참판 댁 아래 초가지붕들이 자아올린 옛 정취는 노랗게 익는다.

행랑채를 들어서 바깥마당을 건너 중문을 지나온 안채에는 토지 마당극이 한창이다. 안채의 동편 사랑채와, 서편에 앉은 별당도 덩그렇게 높다. 사랑채만 해도 뒤채와 더불어 일반 가정집보다 규모가 크니 허구라지만 가히 만석꾼지기답다.

마당극을 뒤로하고 올라간 토지문학관은 이름 그대로 토지를 5부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건물에 비하면 자료들이 무척 소박하다. 토지 일색인데다 ‘토지’ 말고는 책 한권도, 박경리 선생에 대한 자료도 보이지 않는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내려와 버스에 오른다.

귀로에 되돌아보니 오늘 하루 합천을 대신한 하동이 대견하다. 쌍계사는 해인사와 견주기에 힘이 부치나, 평사리는 합천 영상 테마파크에 필적할 만하다.

십 리 벚꽃 길도 백 리 벚꽃 길을 나무의 연륜이 대적해 내니 가히 제대로 된 맞수다. 일부러 골라도 힘들 것을 거저줍다시피 했으니 평소 후덕한 문화원장의 덕분이라 여겨진다.

대연동에 도착하니 길상이 몰던 한우의 후예가 화기(?)충천한 저녁 밥상에서 소주 따라 춤을 춘다. 덩달아 화기애애한 분위기도 끓어올라 넘친다. <남구문협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