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곽태욱 소설가(문현3동)

한 해가 저물 때쯤 “어영부영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라는 글귀가 꼭 뇌리를 스쳐간다. 영국의 유명한 극작가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1925년)인 버나드 쇼의 아흔다섯 해 삶을 묘비에 새긴 글이다. 본래는 “오래 살다보니(머물다 보니)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라고 해야 옳다는 지적도 있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알려져 있다.

어느 쪽이든 그의 비문을 곱씹으면 다분히 자조 섞인 공허함이 배어있는 듯하다. 공허하다는 것은 ‘속이 텅 비다’는 뜻과 ‘실속이 없이 헛되다’는 뜻이 함께 한다. 둘을 합해보면 ‘지금까지 해온 일에 내세울 만한 것이 없어 허탈하다’로 모아진다. 그 원인은 ‘어영부영하다가’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걸출했던 한 인물의 생애를 함축적으로, 그리고 자조적으로 표현한 그 비문은 자신을 최대한 낮추는 최상의 겸손함을 내포하고 있다. 헌데 연말이 되면 바깥으로 드러난 그 글귀만 유독 떠오른다. 새해가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올 한 해 동안 뭘 했는지 모르겠다는 실망감이 앞서기 때문이다. 게을러서, 혹은 무능해서, 그게 아니면 바쁘다는 핑계로 어영부영하다가 한 해를 보낸 것 같아 허전하기도 하다.

그래서 그러한 잘못들을 반성하고 올해 못다 한 것을 내년에는 반드시 성취하리라고 다짐하며 계획을 다시 세우고 밝아오는 새해를 차분하게 맞으려 한다. 그것이 ‘송구영신’이다. 이에 즈음하여 우리 조상님들은 섣달 그믐날이면 부뚜막과 장독대, 측간이나 곳간 등에 환하게 불을 밝혀 집안에 있던 묵은 액운을 쫓고 희망찬 새 기운이 들기를 기원하며 온 가족이 얘기꽃을 피우면서 하얀 밤을 지새웠다.

또 부루단지(조상단지) 속의 묵은 씨앗을 비우고 대신 가을걷이 때 얻은 새 씨앗을 채우며 내년 농사가 풍년 들기를 기원하였고, 한 해 동안 무엇을 잘못했는지, 남에게 진 빚은 없는지, 격조했던 친구를 만나거나, 존경하는 어른을 찾아뵙고 덕담을 듣기도 하고, 새해 첫날에는 세화(歲畵)라 하여 용이나 호랑이 등이 그려진 액막이 그림을 문짝에 붙이기도 했다. 이러한 풍속이 송구영신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망년회’라는 이름으로 송구영신을 대신하고 있다. 크고 작은 모임에도 빠짐없이 참석한다. 이 통과의례를 거치지 않으면 한해를 마감한 것도 아니고 새해를 맞는 것도 아닌 것처럼 여긴다. “연말에 그해의 온갖 괴로움을 잊자는 뜻으로 베푸는 모임”이 망년회라는 국어사전의 설명대로라면 뜻 깊은 자리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망년회는 본래 일본에서 섣달그믐에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여 음주가무를 즐기며 흥청거리던 일본인들의 세시풍속이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우리 식의 송년 모임이 된 것이다. 그런 우리의 망년회는 앞만 보고 달려온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이 커서인지 언제부턴가 술로 시작해서 술로 끝나는 모습을 보여 왔다.

더욱이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캐럴송도 흐르고 네온사인 불빛도 화려해지는 때라서 자연히 흥청거리는 분위기에 마음이 들뜨게 된다. 그런 분위기에 휩쓸리면 자칫 과도한 음주로 이어져 건강을 해치거나 후회하는 일이 생긴다. 아무렴 한해를 그렇게 마무리한다면 허탈한 공허함만 더 커질 뿐이다.

그래서 연말연시를 뜻 깊게 보내려고 작은 정성을 나누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 선행은 추운 날을 보내는 어려운 이웃에게 따뜻한 온기가 되고 희망이 된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지속적으로 온정을 전하게 된 사람들은 마음이 늘 평화롭다고 말한다.

새해가 밝아온다. 2014년은 갑오년 말띠 해이다. 생동감 넘치는 이미지를 자랑하는 말은 뛰어난 순발력과 탄력 있는 근육질로 무척 강인한 인상까지 준다. 갈기를 드날리며 질주하는 기상은 12간지 동물 중 따를만한 동물이 없다. 앞만 보고 내달리지 말고 주위를 둘러보며 마음의 평화만 보탠다면 그 어느 해보다 더 역동적인 한해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