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윤선

아버지는 내가 32살 되던 해, 그러니까 딸 재희가 태어난 그 해 돌아가셨다.

내 나이 32살, 엄마보다 무려(?) 17년이나 더 사셨기에 그런 아버지와의 이별이 그리 빨랐다는 걸. 그때는 실감하지 못했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에 비해 나는 결혼도 했고 책임져야 할 어린 자식도 둘이나 둔 상태여서 하늘이 무너질 것 같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남편이 지금의 나이에도 부모님이 건강하신 걸 보면 나는 엄마든 아버지든 부모님과의 '연'이 참 짧았구나 싶다.

설거지를 하다 고무장갑이 샌다. 바람을 넣어 손가락 풍선을 만들어보니 바람 빠지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린다. 벗어서 홀라당 버리고 새것을 꺼냈다. 문득 아버지 생각이 들었다.

뭐든지 아낄 수밖에 없던 시대를 우리 아버지 세대는 사셨다. 어릴 때 아버지는 고무장갑에 구멍이 나면 구멍을 때워 주셨다.

우선 구멍 난 부분을 실톱 같은 걸로 가볍게 문질러 접착력을 좋게 한 뒤 그 부분에(버리려고 둔) 다른 고무장갑을 동그랗게 잘라 본드로 붙였다. 그러고 얼마를 더 썼는지는 모르겠다. 그랬다.

치약을 다 써 갈 때면 새것을 미리 꺼내 놓으셨다. 나는 두 번 생각 안하고 새것을 꾹꾹 짜서 썼다. 당신은 다 쓴 치약을 반 잘라 벽에 붙은 것까지 한참을 더 쓰셨다. 궁상맞다고 짜증내던 것을 요새 내가 그리하고 있다.

고무장갑을 버릴 때마다, 빈 치약을 반 자를 때마다 그런 아버지가 자꾸 떠오른다.

언니와 오빠는 혈기왕성한 젊은 아버지를 기억한다. 그러나 12살 작은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이미 힘이 빠진 할아버지 같은 모습이다.

언니와 오빠는 소리치던 아버지를 기억한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늦게 들어오는 막내딸을 아파트입구에서 걱정하며 기다리던 모습이다.

언니는 엄마와 싸우던 아버지를 기억한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남천동 벚꽃길을 나와 팔짱을 끼고 걷던 모습이다.

아무래도 우리는 아버지가 다른 자매인가 보다. 그리고 지금,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17년을 홀로 쓸쓸히 보낸 아버지이다.
독자·김해시 장유동